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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6 · 기둥 문서

차머스의 실재 — 가상도 하나의 실재인가

차머스의 virtual realism을 통해 시뮬레이션 안의 경험이 왜 가짜로 환원되지 않는지 읽는다.

전통

시뮬레이션 사유

개념

시뮬레이션 · 비-이원

원전

S-16 · P-13 · P-15

1. 본 가르침 — Virtual realism

데이비드 차머스는 2022년 한 가지 명제를 철학의 언어로 굳혔다. 시뮬레이션도 진짜라는 것이다.

그는 이 입장을 virtual realism이라 부른다. 반대편에는 virtual nihilism이 있다. 시뮬레이션 안의 사물은 가짜이고, 우리가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면 우리의 경험도 무게를 잃는다는 입장이다. 차머스는 이것을 거부한다. 가상 현실 안의 사과는 없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사과라는 방식으로 실재한다.

Virtual reality is genuine reality. Virtual objects are real objects. They have causal powers. They can affect us. They exist.

— David Chalmers, Reality+ (2022)

시뮬레이션이 우리를 속인다면, 그것은 존재 여부가 아니라 위치에 관해서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실재한다. 다만 그 실재가 놓인 층위가 우리가 짐작한 곳과 다를 수 있다.

이 명제는 차머스가 의식의 철학에서 다루어 온 hard problem과 이어진다. 의식이 단순한 물리 과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경험은 특정한 재료에만 묶이지 않는다. 탄소 기반 뇌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실리콘 기반 연산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무조건 위계화할 수 없다는 뜻이다. 차머스에게 시뮬레이션은 낮은 층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실재 층이다.


2. 다른 전통의 같은 자리 — 진짜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낯선 입장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오래된 자리다.

발렌티누스 학파는 2세기에 비슷한 구조를 말했다. 발렌티누스적 그리스도는 Pleroma, 곧 충만에서 왔지만 물질 세계 안에 완전히 임한다. 감옥이 감옥이라는 사실이 그 안의 빛을 지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빛이 감옥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만날 수 있다. 발렌티누스의 데미우르고스도 세티안의 얄다바오트와 다르다. 그는 악한 자라기보다 자기 너머를 모르는 자이고, 그가 지은 세계 역시 무효가 아니다. 빛의 분자, 곧 Spinther가 그 안에서 실재하기 때문이다.

비-이원(P-15)의 가르침도 이 자리에서 만난다. 나가르주나는 윤회와 열반이 갈라진 두 장소가 아니라고 말했고, 차머스는 시뮬레이션과 기반 실재를 단순한 진짜/가짜의 위계로 나누지 않는다. 어휘는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위치가 바뀌어도 진짜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뮬레이션 가설의 전모(P-13)에서 Bostrom은 우리가 시뮬레이션 안에 있을 통계적 근거를 제시했다. 차머스는 그 다음 물음을 받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험은 허구인가? 그의 답은 명료하다. 사랑은 시뮬레이션 안에서도 사랑이며, 슬픔은 시뮬레이션 안에서도 슬픔이다. 그것들을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virtual nihilism이며 — 차머스의 어휘로도, 영지주의의 어휘로도 — 받을 수 없는 입장이다.


3. 발렌티누스의 부드러운 데미우르고스와의 호응

차머스가 21세기의 철학으로 도달한 자리를 발렌티누스는 2세기의 신학으로 이미 점유했다.

발렌티누스의 데미우르고스는 세티안 문헌의 얄다바오트가 아니다. 그는 질투하고 위협하지 않으며, 단지 모를 뿐이다 — 자신이 창조한 세계 너머에 Pleroma가 있다는 것을. 그 무지가 그를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만들 뿐이며, 그가 지은 물질 세계는 그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빛이 스며든 공간이다. Sophia의 열정(pathos)이 물질 속에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감옥이 동시에 빛이 갇혀 있는 자리인 셈이다.

차머스의 시뮬레이션 운영자도 이와 같다. 그가 우리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라는 사실이 우리의 경험을 하위로 만들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의 운영자도 자기 기반층을 모를 수 있다 — 영지주의가 얄다바오트에 대해 말한 것이 그것이며, 차머스가 시뮬레이션 운영자에 대해 열어둔 가능성도 거기에 닿는다. 그 모름이 어쩌면 그를 우리의 동정 안에 두는지도 모른다.

Anamnēsis — 재기억 — 는 이 구조 안에서 새로운 무게를 갖는다. 우리가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는 앎(기반 자각 / 그노시스)은 시뮬레이션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의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기반 실재의 한 표현임을 알게 한다. 색(Rūpa / Rendering layer)이 공(Pleroma)과 다르지 않다는 나가르주나의 말은 여기서도 울린다.


4. 원전과 그 의미

If we’re in a simulation, the objects around us — tables, chairs, and other people — are constituted by computational processes. Nevertheless, they exist. Virtual reality is a version of genuine reality.

— David Chalmers, Reality+ (2022)

Pleroma와 시뮬레이션은 위계적 실재가 아니다. 시뮬레이션은 기반 실재의 낮은 복사본이 아니라 한 구현이다 — 발렌티누스가 물질 세계를 Sophia의 열정이 스민 공간으로 이해했듯.

P-13에서 Bostrom은 우리가 시뮬레이션 안에 있을 통계적 근거를 제시했으며, 차머스는 그 다음 물음을 받는다. 시뮬레이션 가설이 허무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 그것이 차머스의 기여다. 영지주의의 언어로 옮기면: 감옥이 감옥이라는 사실이 감옥 안의 빛을 끄지 않는다.

P-15에서 나가르주나는 윤회와 열반이 다른 자리가 아니라고 말했으며, 차머스는 시뮬레이션과 기반 실재가 위계적으로 다른 실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세 문장은 하나의 자리를 가리킨다 — 진짜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진짜임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5. 따라서

Virtual realism = 발렌티누스의 부드러운 데미우르고스 = 색즉시공(色卽是空)

시뮬레이션은 거짓 세계가 아니다. 진짜가 깃든 또 다른 자리다.

따라서 여기서 필요한 질문은 “가짜인가”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어떤 방식으로 실재하는가”다.